모스크바의 명물 아르바트 거리
2015년 3월 27일 금요일 오후 모스크바 아주 중심가에 있는
우리 롯데 백화점과 롯데 호텔이 있는 모스크바의 명물 거리인 '아르바트'
거리를 찾아서 불금의 모스크바 중심부를 가로질러 달려갑니다.
거리는 옛 건축들이 줄져있는 약 2 Km 로 1980년 러시아 최초 예술인을 위한
차없는 거리로 지정 되었다. 우리나라 인사동과 대학로와 유사하다.
우리 롯데 백화점 한국식당에서 알밥과 불고기 정식으로 맛있게 점심을 하고,
러시아 모스크바의 명물인 아르바트 보행자 거리를 걸어 봅니다.
모스크바의 금요일 불금은 오후부터 벌써 시작이다.
일이 끝나면 연극과 발레극장이나 영화관 그리고 전시관 또는 음식점 거리와
큰 마트 상가에는 주말파티 시장을 보려는 차량과 사람들로
대단한 교통지옥이 시작되여, 우회하여 중심가로 진입하지만... 엄청 힘드네요,
오늘은 보기드문 맑은 날씨지만
양지와 음지가 이렇게 확연히 차이나게 다르다.
세계에서 최상급으로 인정하는
러시아 모스크바 금속 국립대학교 건물이 특이 하네요,
불법 자동차는 이렇게 통째로 들어 싣고간다.
벌금이 무척 쎈 수준. ( 중고 고물차는 벌금이 많아 못찾아 간단다)
독일이 가까워 BMW 는 우리나라 소나타 수준 취급 이란다.
< 거의 독일차가 50%, 영국15%, 일본10%, 러시아 10%, 미국5%,기타5%,
한국차가 15% 인것 같단다 >
시내 중앙 롯데 플라자 지하 주차장에 주차 시킨후
롯데 백화점내 유명한 한국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식사를 합니다.
모스크바의 명물인 아르바트 거리를 천천히
걸어 보려고 롯데 플라자 (러시아 어씀) 건물을 나섭니다.
롯데 프라자 위로가면 신 아르바트 거리로 명동수준
그냥 아래로 가다 좌로돌면 유명하다는 구 아르바트 거리로 갑니다.
여기서 좌측길로 들어서자
곧 차없는 아르바트 보행자 거리가 나타난다.
모스크바의 명물인 아르바트 거리에 들어서자
왜 유명한지를 이제 바로알게 되였다. 제 뒤에 파란 민트색의 건물과
그 앞에 동상이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이자 소설가 "푸쉬킨"
- 알렉산드르 세르게예비치 푸쉬킨 (1799년6월6일~1837년 2월10일) 이
여기 아르바트에서 젊은시절과 푸쉬킨과 아내가 있던곳 이라한다.
< 푸쉬킨 부부의 동상 >
푸쉬킨의 부인 곤차로바는 결혼하가 전부터 상류사회 사교계의
꽃이였다. 결혼후 젊은 프랑스 망명장교 단데스와의 염문설에 휩샇였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삶과 시
푸쉬킨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픔의 날엔 참고 견이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다시 그리워지나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언제나 슬픔 법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지지만
가버린 것은 마음에 소중하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은 오고야 말리니
알락센드르 푸쉬킨은 "러시아 시(詩)의 태양"이라고 일컬어진다.
러시아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문학가 중 한 사람입니다.
푸쉬킨은 시를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해주었습니다.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 한줄의 시 귀절이 바로 그 유명한 삶의 詩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라는 귀절 입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강과 공원(왼쪽>> |
푸쉬킨과 결혼하기 전부터 러시아 상류사회 사교계의 꽃이었던 곤차로바는, 결혼 후 조르주 단테스와의 염문설에 휩싸였다. 단테스는 끈질기게 푸쉬킨의 아내 곤차로바에게 구애했고 이는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
푸쉬킨의 모욕감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내와 자신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푸쉬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했지만, 단테스가 나탈리아 곤차로바의 언니와 결혼함으로써 결투 신청은 없던 일이 됐다.
그러나 단테스의 구애는 계속되었고, 더구나 푸쉬킨에게 익명의 편지가 배달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배반당한 남자가 된 것을 축하한다’는 식의 악의에 찬 조롱이었다. 푸쉬킨은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이 편지를 쓴 것으로 보고 그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고, 결국 위와 같은 비극으로 끝났다.
(그러나 이 결투가 러시아 궁정 내부 세력이 푸쉬킨을 제거하기 위해 꾀한 음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서유럽에 비해 문화적으로 뒤떨어졌던 19세기 러시아에 푸쉬킨은
유럽의 모든 문학 장르를 도입시켰다. 서정시, 서사시, 소설, 단편, 에세이, 희곡 등
모든 장르에 걸쳐 창작의 불꽃을 피워 올린 것이다. 푸쉬킨이 아니었다면
이반 투르게네프, 이반 곤차로프, 톨스토이 등이 가능하지 않았다는 평가도 있다.
- 푸쉬킨 기념박물관 (푸쉬킨이 살았던 집) -
푸쉬킨 생가 상트페테르 부르크에서 태어난 푸쉬긴은
모스크바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 했다고 한다.
현제 러시아 대통령인 푸틴도 상트페테르 부루크 출신,
파란집 뒤로 러시아 외무성이 보인다.
네바 강변에 있는 러시아문학연구소. 공식 명칭보다
‘푸시킨의 집’으로 불리는 이 건물은 러시아 문학 및 인문학 연구의 본산이다.
푸쉬킨이 어린 시절을 보낸곳으로 지금은 각종
개인 콘서트 및 초상화를 그려주는 사람등, 문화와 예술의 거리이다.
오늘은 아직은 시간도 이르고 날도 춥고하여
아르바트 거리에 관광객과 사람들이 무척 적은편이라 한다.
이곳 구 아르바트 거리는 모스크바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곳중 하나란다. 옛 서적들을 팔고있는 많은 노점들이 많은데 좋은 서적도 있다고 한다.
"아나톨리 리바고프" 의 동상
"아르바트의 아이들" 이란 소설로 아르바트 거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사람, 그의 많은 작품의 배경이 이곳 아르바트 거리가 되기도 한곳
< 소설가 "아나톨리 리바고프" 의 동상과 기념 조형물이 있는 길거리 작은공간 >
러시아의 가장 큰 패스트 푸드점인 < 무무식당 > 의 아르바트점
항상 젓소가 식당앞에 서있는 <무무>식당은 엄청 맛있다는 러시아 전통식당이다.
음식이 좀 짜서 맛보다는 가격이 착하다. 무무 식당은
음메하는 소울음 소리의 의성어 인데 모스크바 곳곳에 체인점이 많다.
러시아 전통 인형인 '미뜨로 쉬카' 매장이 즐비 하지만 다소 비싼 편이다.
( 인형속으로 인형 수십개가 계속 들어감)
색소폰을 불고있는 젊은 청년이 멋지네요,
빅토르 최의 추모벽 ( Victor Choi 의 벽 )
빅토르 최는 러시아 한인 3세로 그룹 KINO 의 맴버 였다.
소련시절,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노래를 많이해서 러시아의 청년들이
엄청 추종하였다 는데... 그러던 어느날 의문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빅토르 최가 사고를 당한 곳은 라트비아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아직도 가서 추모 한댄다
러시아의 전설적인 인물이 었다고 하는 빅토르 최,
관련한 낚서들과 그의 펜들이
모임 장소로 이용되고 있고 담벼락 모임 장소가 있다.
이곳 구 아르바트 거리는 특별하게 편한 마음으로
모스크바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곳중 하나란다.
"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고, 우리 곁에 있습니다"
'빅토르 최의 추모 벽'
아르바트 거리를 찾는 사람들중 가장많이 이곳을 찾으며
비틀즈 이상으로 칭송한다는 러시아 인의 사랑받는 '빅토르 최' 추모의 벽.
아르바트 거리에 모스크바 젊은이들이
멋진 화음으로 경쾌하고 즐겁게 길거리 콘서트를 한다.
아르바트 거리에 멋진 황금색 분수대가 있다.
여름철 시원한 물줄기가 젊은들을 불러 모으는 명소라고 하네요,
- 황금 분수대 -
그림들을 즉석 흥정하며 살수도 있고 구경도 하지만
길거리 작품을 찍을때 허락을 얻어야 실갱이를 못하게 할수 있다.
예술가의 거리라 불리울만큼 곳곳에 그림들과 공예 조각품들을 파는곳
현장에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과 직접 캐리커쳐도 있고, 진짜 초상화도 있어요,
아르바트는 오래전 15세기때 부터 모스크바 도시의 중심인
크레믈린 광장에서 가까운 모스크바의 심장이라 불리곳을 잘 보고 갑니다.
길가에 녹색 십자가 표말이 붙어있는
이런곳이 몸이 아풀때 필요한 약을 구하는 약국입니다.
롯데 백화점 주차장으로 돌아와
길맞히기 전에 모스크바 남부쪽으로 돌아 갑니다.
모스크바강 다리를 건너 달려 갔지만
1시간 30분이 지나서야 남부 방향에 진입할수 있었다.
푸쉬킨이 젊어서 살았던 .. 아르바트의 거리를 걷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추 신 ---------------------------------
푸쉬킨의 일생
알렉산드르 푸쉬킨(Alexandr Pushkin)의 가족사를 보면 어머니의 증조할아버지는
Abram Petrovich Gannibal9(흑인)으로 아프리카 족장의 아들로 러시아인에게 노예로 팔려와 표트르
대제에게 바쳐진 후 신임을 얻게되어 귀족계급까지 오르게 되었다 합니다.
푸쉬킨은 열렬한 구애끝에 나탈랴 푸쉬키나(결혼전 성은 Goncharova)라는 경국지색의 아리따운 13세 연하의
미모의 아내를 얻었습니다.
네자녀를 두었던 곤차로바는 러시아(당시 황제시대)사교계에서 네덜란드 외교관이었던 단테스 데 헥케른 D
남작과 염문을 뿌리게 됩니다.
단테스와 나탈랴가 내연의 관계라는 소문은 러시아 사교계에 소문이 나게 되고 드디어 불쾌한 소문을 접한
푸쉬킨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됩니다.
푸쉬킨의 아내는 미인이었지만, 젊고 잘생긴 남자들에게 환심을 사는 행실로 소문이 파다한 아내였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 황제 짜르에게까지 그런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결국 1837년 1월 27일 상뜨 뻬쩨르부르크에서 두 사람의 운명적인 결투가 있었습니다.
이 결투에서 푸쉬킨은 단테스가 쏜 총알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고 이틀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나이 38세에 일생을 하직하게 됩니다.
(단테스는 나탈랴 여동생의 남편으로 푸쉬킨에게는 처제의 남편이었습니다.
푸쉬킨의 정적들이 자유분방한 푸쉬킨을 제거하기 위해 헛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후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는 러시아의 횃불 같은 시인 푸쉬킨은 아내의 행실에 노여워하는
바람에 슬픔의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신의 시처럼 노여워 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면 아마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전세계의 문학 독자들은 주옥같은 그의 작품을 더 많이 즐길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푸쉬킨은 아내를 탐하는 사람들로 부터 자신의 명예와 가족을 지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2014.2.5. 산인 드림 the end ........ 감사합니다.
푸쉬킨이 가지는 러시아 문학사상에서의 의미를 한마디로 한다면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 문학의 예술적 완성과 러시아 근대문학의 전통과 사실주의 문학을 확립한 작가이다.
그리고 그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더라도>를 두고서는...
평이한 시어로 삶에 대한 진지한 시각을 드러내고 있는 시로 푸쉬킨의 시 중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작품이다.
푸쉬킨은 아내 나탈리야의 낭비벽으로 재산을 모두 탕진했으며,
또한 그녀는 프랑스 혁명때 도망친 프랑스 망명 귀족 단테스와 바람이 났다.
푸쉬킨은 단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그 부상으로 이틀 후 38살에 젊은 나이에 죽게 된다.
푸쉬킨의 사랑과 죽음
젊은 나이로 허망하게 맞은 푸쉬킨의 죽음을 두고서
'당시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아낀 많은 러시아 민중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한다.
푸쉬킨은 여자 보는 눈이 없어 얼굴은 예쁘지만
'머릿속이 하얀 여자'를 마누라로 얻어 불행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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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야 곤차로바. 그 빈 머리(지적 수준이 미달되는)와 미모로 인해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목숨까지 잃는 결과를 낳았다고. 1826년 푸시킨은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부름을 받고 유배지에서 돌아와 지내다 16세(13세 연하)의 나탈리야를 보고 반하게 되는데, 일찍이 그가 "현기증을 느꼈다"고 했을 만큼 빼어난 미모의 여성이었다. | |
Natalya Goncharova, Pushkin's wife. Painted by Ivan Makarov (184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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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이 결혼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른다. 가난했던 신부 측은 푸시킨의 가문에 반해 결혼을 승낙했던 것이다. <모스크바 아르바트거리 신혼집 앞의 푸시킨부부> |
이런 와중에 아내의 불륜을 암시하는 투서까지 날아들었다.
황제의 근위병 중에는 프랑스 혁명 때 러시아로 망명해온 귀족(단테스)이 있는데,
둘이서 몰래 만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푸시킨의 진취적인 사상을 미워한 당시 세력가의 음모라는 설,
혹은 황제와 나탈리의 불륜을 덮어주기 위한 계책이란 설도 있지만,
푸시킨은 '간통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익명의 편지에 분개했다.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연적'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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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강과 공원(왼쪽>> |
이 모든 것을 종합해 푸시킨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 같다고 다들 얘기한다.
맞는 말이다. 내가 정말 이상하게 여기는 것은, 푸시킨의 문학인생은 그가 쓴 시형(詩形)소설
'예프게니 오네긴'(Evgenii onegin)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누구 하나 말하지 않는 점이다.
'이것은 러시아 문학사상 최초의 리얼리즘의 달성을 보여준
작품으로 당시 러시아 사회의 특질을 남김 없이 그렸다.' 그렇게만 평할 뿐이다.
소설의 주인공 오네긴은 다름아닌 작가 그 자신이었다. 다만 여주인공의 성격과 푸시킨 자신의
역할이 정반대였는데, 이는 작가도 짐작하지 못했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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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여주인공 타티아냐 같으리라고 여겨 반했을 아내 나탈리야는 실제 '내면에 사랑과 자유와 평온을 함께 지니고 있는 여인'이 아니었으며, 또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상대의 자존심을 도발해 결투를 신청하게끔 하고 죽게 만들었으나, 현실에서는 푸시킨 자신이 격분해 결투를 신청하고 죽음을 맞는다. <예프게니 오네긴과 블라디미르 렌스키의 결투- by Ilya Rep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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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까지 계속하였다.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듯 세월의 흐름따라 서서히 줄거리를 엮어 갔던 것이다. |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자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알렉산드르 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로 우리에게 친숙한 러시아 작가 푸시킨.
그는 38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희곡, 시, 소설 등 다양한 문학 장르에 걸쳐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학세계를 펼쳐 보였다.
러시아의 국민적 작가에서 더 나아가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사랑과 영광과 비극은 어떠했는가?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
그날도 페테르부르크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지만, 오후 4시가 넘어 교외 공터의 공기는 평소와 달랐다.
주변은 나무가 둘러싸고 있고, 두껍게 눈이 쌓인 러시아의 전형적인 겨울 풍경이다.
총을 든 두 남자의 눈가에 분노와 긴장이 갈마들어 감돈다. 정적을 깨뜨리며 발사된 총탄. 한 남자가 배를 움켜쥐며 눈밭에 쓰러진다.
눈밭을 적시는 낭자한 선혈. 온 얼굴이 눈 범벅이 된 채 겨우 일어난 남자가 소리친다. “브라보!”
푸시킨과 단테스의 결투
남자는 페테르부르크 모이카 12번지에 있는 집으로 급히 옮겨진다.
때는 1837년 2월 8일 오후 4시 30분경. 남자는 이후 이틀 동안 심하게 앓았다.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남자. 아내는 남편의 비명에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남자는 아내가 자기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그래도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의 방에 들어왔다. “얼음을 달라!” 아내가 갖다 준 얼음을 이마에 올려 굴리다가 얼음을 먹는 남자. 그가 입을 연다. “잘 있어! 친구들!” 곁을 지키는 친구가 한 명도 없는데 느닷없이 친구라니. 그가 부른 친구란 서재에 있는 책들이었다. 남자는 의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꿈에서 책 더미 위로 올라갔어요. 책 더미가 너무 높아 머리가 핑 돌 지경이었지요.”
2월 9일과 10일에 걸쳐 모이카 12번지 주변에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놀라 명령을 내렸다. “장례식 장소를 비밀리에 변경할 것, 일반인의 장례식 참석 엄금, 가족과 친구들만 참석 가능, 군대는 비상 대기할 것, 황실 주치의를 보낼 것, 불법 결투를 벌였지만 사면할 것, 신문의 과격한 추모 기사는 엄금.”
결국 남자는 2월 10일 숨을 거두었다. 러시아 구력 1월 29일. 신력으로 2월 10일 오후 2시 45분 러시아 작가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38살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법으로 금지돼 있던 결투를 벌인 푸시킨의 상대는 조르주 단테스. 러시아로 망명한 프랑스군 장교로 네덜란드 공사 헤케른의 양자였다. 푸시킨이 단테스의 양아버지 헤케른에게 모욕적인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단테스는 푸시킨에게 결투를 신청한 터였다.
그들이 결투한 곳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결투를 위해 두 사람이 각각 자리 잡았던 곳이다. 푸시킨의 소설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렌스키는 오네긴과의 결투에서 죽음을 맞는다. 렌스키의 운명이 곧 푸시킨의 운명이 되고 말았으니, 소설이 하나의 예언이었던가. 꽃다운 16살 소녀 곤차로바를 처음 만나 ‘아!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이여! 내게 생명을 불어넣는 여인이여!’라며 정열을 불태웠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건만, 매혹적인 자태의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1831년에 결혼해 네 명의 자녀들을 남겨두고 푸시킨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곤차로바는 1844년에 재혼한다).
푸시킨과 아내 나탈리아 곤차로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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