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산17-4
김좌진 장군 생가지
http://history.hongseong.go.kr/history/sub05_04.do
2017년 5월17일 수요일 오전8시30분 부천 신중동역에서 친구님을
만나 서울외곽도로를 달려 판교IC로 나가 친구님과 함께하며 중앙고속도로 안성
분기점에서 평택고속도로를 달려 서해대교 행담도 휴게소에 도착,
잠시 쉬여가며.. 홍성IC에서 김좌진 장군 생가지인 백야기념관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한 백야기념관에는 버스로 봄 소풍온 초등학생들의 관람을 보며
옛 국민학교 시절을 회상하면서 친구님들과 김좌진 장군 생가지를 관람합니다.
< 많은 시간이 지나서 이제야 블로그에 올립니다 >
백야(白冶) 김좌진(金左鎭) 장군이 태어나 성장하였던 곳이다.
고종26년(1889)선원 김상용의 10세손인 형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호방영민 하였으며 용력이 뛰어나 18세 때에는 이미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그는 광복단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겪은 후 1918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와 함께 서명하였다.
1919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
리고 사관연성부를 설치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1920년 10월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맞아 7일 동안 10여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 3,000여명을 살상하는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1925년 김 혁, 최 호, 나중소 등과 함께 신민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1929년 김종진, 이을규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여 수석에 취임하여 재만 동포의 교육과 민생에 주력하는 한편 중국의 항일 세력과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준비하던 중 1930년 1월 24일(음 12월 25일) 북만주 중동선 산사역 부근의 정미소 앞에서 동지였던
박상실의 흉탄에 순절하였다.
생가지에는 1991년부터 성역화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의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고 관리사 및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김좌진장군 사당(백야사)은 98~2001년까지 성역화사업 추진으로 2,880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내ㆍ외삼문, 재실, 주차장 등을 조성하였으며, 매년 음력 12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함께 여행한 거북이 친구님의 사진에서...
" 백야기념관 "
서산 간월도와 안면도로 가는 들머리인 홍성나들목을 나가면 왼쪽으로 김좌진 생가와 한용운 생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나란히 서있다.
이를 따라 들어가면 작은다리 건너편으로 커다란 기와집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좌진 생가다.
입구를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백야기념관> 건물이 있다.
여기에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인생여정과 청산리 전투에 대해 소상하게 전시되어 있다.
전투 당시의 전황도를 비롯해 전투에서 사용되었던 화기들도 전시되어 있다.
백야기념관 왼쪽의 조촐한 기와집이 실제로 김좌진이 태어나서 어린시절을 보냈던 생가다.
생가터는 일제에 의해 모두 망가지고 심지어 그의 기운을 뺏기 위해 집터 뒤의 산까지 파헤치는 만행을 겪게 된다.
광복 후에도 30여 년간을 흔적으로만 남아있다가 1991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생가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였고, 백야기념관도 건립하였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곡간채, 헛간채등 4채의 가옥만 복원되어 있지만 실제는 80여칸이 넘는 대가였다고 전해진다.
친구님들과 함께 분향하며 묵념을 올리고...
친구님들과 홍성 '김좌진 장군 생가지' 를 다녀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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