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경기 화성시 '남양성모성지' 순례

마이동 2023. 1. 2. 13:57

 

 

2022년 10월 30일 일요일 오후, 매형님과 누님과 함께 경기 화성시

제부도 관광을 끝내고 경기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모성지' 주차장에

도착, 자동차를 겨우겨우 주차 시키고, '남양성모성지' 를 순례하려

출발 하였지만...

제가 좀 자세히 잘 검색하지  않고 그냥 찾은것이 문제가 되었네요,

'남양성모성지' 확장 공사로 순례가 어려워 그냥 대략 '성모성지'를

찾아뵙고 돌아와야 하였습니다. 힘들게 고생하신 매형님과 누님께

송구하며...  다음을 예약하며 돌아갑니다.  

 

 

 

 

 

 

 

 

 

 

 

 

 

 

 

 

 

남양성모성지(華城南陽聖母聖地)

경기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지번) 남양읍 남양리 1704

031-356-5880

 

 

화성 남양성모성지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이자 순례지이다. 천주교 수원교구 관할 성지이다.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는 천주교 성지이자 순례지로 대한제국 고종 재위 때인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및 박해인 병인박해 당시 화성 및 수원

지역의 조선인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등에서 건너온 천주교 신부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였던 박해지이자 순교지이다.

지리적으로 충청남도 당진시에 있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신부 유적(솔뫼성지)와 

당진 신리 다블뤼주교유적지(신리성지)와 함께 한국의 천주교 순교자들의 넋을 기리는

순교지이지만 이들과는 달리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었고 순교자들 또한 대부분

무명에 불명인 인물들이어서 행적 또한 그리 알려지지 않아서 무연고지로 방치되었다가

1984년 천주교측에서 이 곳이 조선 후기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의 순교지였다는 고증을

밝히면서 성역화를 추진하였으며 1991년 천주교 수원교구의 공인으로 성모성지로

승격되어 천주교 순례지가 되었고 현재 천주교 수원교구 관할 성지이다.

 

화성 남양읍 지역은 서해안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청나라에서 건너온 서양권 신부들이

조선으로 입국을 하는 거점지 역할을 하였으며 또한 조선왕조의 천주교 탄압이 심해지면서

한양에서 떨어진 화성 남양과 수원 등지에서 은신하면서 천주교 선교활동을 하다가 당시

남양도호부의 체포령에 따라 남양 지역과 수원 지역 등지에서 은신하던 천주교 신부와

선교사, 그리고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체포되어 참수 및 사형되었다.

 

역사

로마 가톨릭교회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보수 성향의 유림 및 유교에서 서학에

대한 배척이 심해지면서 조선에 들어왔던 천주교 신부들이 화성 남양이나 당진 등

충청도 지역으로 은신하게 되었으며 화성 남양 지역에도 천주교 신부들이 대거 은신

하면서 화성 및 수원 지역에 천주교 선교 활동과 복음 전파를 전하게 되었지만 1866년

천주교 박해인 병인박해가 일어나면서 남양 지역을 관할하는 남양도호부에서 남양

지역의 천주교 신부,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에 따라 남양 지역에서 천주교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이 대거 체포되어서 참수 및 사형을 당하였으며 대부분이 무명의

신자들이라 한동안 무연고지로 방치되었다가 1984년 천주교측이 이 지역에서 천주교

신부와 신자들이 대거 박해로 순교하였던 곳이었다는 것을 고증으로 들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1991년 천주교 성지로 승격되어서 천주교 수원교구의 성지가 되었다. 2021년

에는 성지 안에 있는 천주교 성당인 성모마리아 대성당이 세워졌다.

 

 

 

 

 

 

 

 

 

 

 

 

 

 

 

 

 

 

 

 

 

 

 

 

 

 

 

 

 

 

 

 

 

 

 

 

 

 

 

 

 

 

 

 

 

 

 

 

 

 

 

 

 

 

 

 

 

 

 

 

 

 

 

 

 

 

 

 

 

 

 

 

 

 

 

남양 성모성지 대강당은 2011년 부터 2017년 설계가 진행되었고, 2017년 공사가

착공되어 2020년 12월 대성당이 준공되었다.

 

국내에 이미 리움미술관, 강남교보빌딩 등을 설계한 바 있는 게뎨적인 건축가로서

여러 나라에서 미술관, 문화센터, 각종 대성당 등 다양한 종교시설을 설계해 온

'마리오 오타'(Mario Botta,  1943년생. 스위스) 와 한만원의 합작으로 만든 수작입니다.

 

< 다른 블로그에서 조용히 모셔온 글 과 사진입니다> 

 

 

 

 

 

 

 

 

 

 

 

 

 

 

 

 

 

 

 

 

 

 

 

 

 

 

 

 

 

 

 

 

 

 

남양성모성지는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리에 있는 한국 로마 가톨릭교회의 순교 성지이다.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이름 없이 치명한 많은 순교자들을 현양하는 순교성지이며,

1991년 10월 7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됨으로써 한국 천주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지

(성모 마리아 순례 성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남양 성지는 우리 나라 유일의 성모 성지이다.

 

순교자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네 명의 남양 순교자는 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이다.

남양 순교자들에 대한 간략한 순교 행적은 다음과 같다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1812~1868년)

 

김 필립보는 충청도 면천(沔川) 중방리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들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부친의 반대로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다가 훗날 그의 부친이

마음을 돌려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게 되면서 부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영세하게 되었다.

장성한 뒤 박 마리아와 혼인한 필립보는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본분을 잘 지키게 하였으며,

다른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도 열심히 노력하였다. 본래 성품이 순량한데다가 신앙생활에

철저했던 그는 이후 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그는 신부가 공소를 순방할 때마다 모든 준비들을 직접 하였고, 교우들이 타당하게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곤 하였다. 그러다가 필립보는 좀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수원 걸매(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에 의해 다시 회장으로 임명된 필립보는 한결같이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 교우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필립보는 아내 마리아와 함께

자식들을 데리고 충청도 신창 남방재로 피신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8년에 다시 박해가 성하게 되자, 필립보는 홍주 신리(新里, 현 충청남도 합덕읍 신리)에

살던 사위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남양(南陽)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곳으로 들이닥쳐 그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때 필립보는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포졸들이 온 것을 알고는 기도를 다 마친 뒤에 스스로

그들 앞으로 나가 자신이 바로 ‘그대들이 찾던 신자’임을 자백하였다. 포졸들은 필립보를 체포하자마자

매질을 하고는, 천주교 신자들과 교회 서적이 있는 곳을 대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렇게 체포되었다고 어찌 천주교를 믿지 않겠는가? 우리를 내시고 기르시며 사후에 심판하실 주님을

마땅히 힘을 다해 공경해야 한다.……책은 지난 박해(즉 병인박해) 때에 모두 불태워 버렸고, 아는 신자

하나 없이 나 혼자 얻어먹고 다니며 살았다.”

그러자 포졸들은 필립보에게 수갑을 채운 다음 남양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그의 아내 박 마리아는 필립보와

포졸들이 말려도 듣지 않고 “남편을 따라가 함께 죽겠다”고 하면서 자원하여 따라 나섰다.

이들 부부는 남양 옥에 한 달 정도 갇혀 있으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신앙을 굽히지 않고 교회 일은

하나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8년 8월 3일 부부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들 부부는 동갑으로 57세였다.

 

정 필립보(? ~ 1867)

경기도 용인의 덧옥돌에서 살았는데, 1866년 11월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붙잡혀 가혹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다음해 1867년 1월에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김홍서 토마(1830 ~ 1868)

수원 걸매리(현 충청남도 아산시 걸매리) 사람으로 1868년 남양 감영의 포졸에게 아내와 함께 붙잡혀

남양으로 끌려왔다.

아내는 배교하여 풀려났으나, 김홍서 토마는 끝내 배교치 않고 김필립보 부부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배교한 아내는 김홍서 토마가 순교하자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 김홍서 토마의 나이는 38세였다.

 

 

 

 

 

 

 

 

 

 

 

 

 

 

 

 

 

 

 

 

 

 

 

 

 

 

 

 

 

 

 

 

 

 

 

 

 

 

 

 

 

 

 

 

 

 

 

 

 

 

 

 

 

 

 

 

 

 

 

벌써 지난해가 되여버린 매형님. 누님과 함께한 추억들을 생각하며...

이렇게 뒤늦게 제 블로그에 올려드려 죄송합니다.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