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 님들

인제 합강정

마이동 2012. 9. 5. 23:25

 

 

 

인제 합강정

 

 

 

2012년9월3일 월요일 아침 그동안 태풍과 비가오는 날들이 지나고

계획하였던 강원도 여행을 위해 한강변을 달려 춘천 가평휴게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커피 한잔의 즐거움을 나누고 동홍천을 지나 인제 합강정에 도착.

 내린천의 물길을 바라보며 잠시 쉬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가져봅니다. 

 

 

 

 

 

 

 

 

 

 

 

 

 

 

 

 

 

 

 

 

 

 

 

 

 

 

 

1.合江亭/합강정

水流何處逢/물은 흘러 어디서 만나는가

亭立天然面/정자가 선채로 천연스레 바라보네

紋浪兩邊來/양쪽에서 오는 물결

繡屋平地轉/평지를 돌면서 정자를 수놓네

如非此勝區/만약 이곳이 승구(勝區)가 아니라면

安得爲名縣/어찌 이름 난 고을이라 할 수 있으랴

泉老曾爰居/물같이 늙지 않고 이에 살아남아서

遺芬若可見/유적으로 이름난 곳 볼 수 있었네.

 

 

 

 

 

 

 

 

 

 

 

인제의 시인: 박인환

 

 

박인환 시인 : 강원도 인제군 합강정에 시비가 있음.

< 목마와 숙녀 >

 

 

 

 

 


그 사람 잊었지만 그 시는 잊지 못하네

[서평] 박인환 시인 타계 50주년 맞아 나온 <박인환 깊이 읽기>
..............................................이종찬 시인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몇 토막


그의 시는 쓸쓸한 사랑의 노래로 서글픈 민족의 자화상으로 남아 있다

▲ 맹문재 편 <박인환 깊이 읽기>
ⓒ 서정시학

늦가을, 하면 늘 떠오르는 시가 있다. 낙엽이 머리와 어깨를 툭툭 치며 떨어질 때면 자신도 모르게 나직하게 읊조려지는 가을노래가 있다. 일찍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 메마른 잎사귀 곳곳에 뻥뻥 뚫린 구멍을 바라보고 있으면 새파란 서른의 나이에 훌쩍 이 세상을 떠나버린 한 시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빈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는 슬픈 시 '목마와 숙녀'... 지금도 낙엽이 질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옛 사랑을 그리워하며 쓸쓸하게 부르는 '세월이 가면'... 그리고 한국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의 도시 한 구석 목로주점에서 사랑의 비가를 서글프게 읊조리던 시인 박인환...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시인. 그리고 5년 뒤 다시 한국전쟁을 겪어야 했던 시인. 그 시인은 폭음 끝에 급기야 심장마비로 세월을 따라 이 세상을 버렸지만 그의 시는 지금도 이 세상에 남아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숙이 박혀 있다. 때로는 쓸쓸한 사랑의 노래로, 때로는 서글픈 우리 민족의 자화상으로.

그래서일까. 시인 맹문재는 최근 '박인환 시인 탄생 80주년 타계 50주년 기념'으로 엮은 <박인환 깊이 읽기>(서정시학)에서 "박인환은 1950년대의 그 어떠한 시인보다 사회참여 의식이 강했다"고 말한다. 맹시인은 1950년대 박인환의 시를 조목조목 들추어내며 "그의 시는 모더니즘적인 면이 있기는 하지만 리얼리즘 시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못 박는다.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나 서울로 황해도로 다시 서울로 옮기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시인 맹문재(안양대 국문과 교수)가 시인 박인환의 시를 리얼리즘 시로 못박는 이유는 따로 있다. 1949년, 시인 박인환이 김경린, 김수영, 임호권, 양병식 등과 함께 펴낸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실은 '열차', '지하실', '인천항' 등의 시를 곰곰이 살펴보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밤이면 열차가 지나온/ 커다란 고난과 노동의 불이 빛난다"(열차)거나 "황갈색 계단에서 내려와/ 모인 사람들은/ 도시의 지팡이와 싸우고 있다"(지하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간다"(인천항) 등은, 서구 모더니즘을 추구한 것이라기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대항의식이 더 짙다는 것.

시인 박인환은 11살 때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이사를 한다. 이어 1942년 시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아버지의 핏줄이 있는 황해도로 따라가 명신중학교,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입학한다. 그리고 1945년 광복과 함께 홀로 서울로 올라와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연다. 박인환은 그때부터 서점에서 수많은 문인들과 만난다.

이듬 해 1946년 12월, 박인환은 <국제신보> 주간으로 있던 송지영의 추천에 의해 '거리'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온다. 그때에는 일정한 등단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선배 문인들의 추천을 받아 지면에 시를 발표하면 공식적인 문인으로 인정했다. 그 뒤 <자유신문사> 문화부 기자, 경향신문 기자, '후반기' 동인, <주간국제> 편집장, '대한해운공사' 등에 다녔다.

 



 

▲ 광복, 남북분단의 혼란기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다간 시인 박인환
ⓒ 서정시학

시인 박인환은 허무주의적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 '세월이 가면' 모두(<목마와 숙녀> 1976)


요즈음에도 가을만 되면 사람들이 자주 노래로 부르는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 시인이 1956년 이른 봄 이 세상을 떠나기 며칠 앞, 명동의 어느 목로주점에서 쓴 시다. 이 시는 박인환이 발표하자마자 시인의 벗이었던 이진섭이 곡을 붙였고, 테너 임만섭이 노래로 불렀다. 그때 풍경을 작가 이봉구는 이렇게 말한다.

"1956년 이른 봄 명동 한복판 빈대떡집 깨진 유리창 안에선 새로운 사랑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였다.

"자 다시 한번."

...첫 발표회나 다름없는 모임이 동방싸롱 앞 빈대떡집에서 열리게 되었다. 박인환은 벌써부터 흥분이 되어 대포잔을 서너 잔 들이키고, 이진섭도 술잔을 든 채 악보를 펼쳐놓고 손가락을 튕기는가 하면, 그 몸집과 우렁찬 성량을 자랑하는 임만섭이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봉구, <명동 그리운 사람들>(일빛) 몇 토막


그때부터 이 노래는 일반 사람들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뒤 가수 박인희가 이 노래를 불러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을 엮은이 맹문재는 "박인환이 우리 시사에 허무주의적 로맨티스트로 각인되어 있는 것은 그가 말년에 남긴 이러저러한 낭만적 작품들('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 때문"이라고 되새긴다.

'시민정신'이라는 렌즈로 도시를 들여다 본 시인 박인환

시인 박인환을 허무주의적 로맨시스트에서 리얼리스트로 이끌어내는 <박인환 깊이 읽기>는 시인의 시의 속내와 삶을 제대로 더듬어보기다. 박인환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목마와 숙녀'의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란 싯귀에서도 한국전쟁 뒤 폐허로 변한 도시의 쓸쓸한 모습과 전쟁의 아픔이 곳곳에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맹문재가 엮은 이 책은 시인 공광규(단국대 강사), 문학평론가 오문석(연세대 연구교수)이 '문학사론'을 썼고, 시인 김경린, 김규동, 김차영, 양병식, 조향이 '시인론'을 썼다. 그리고 시인 박찬일(추계예대 겸임교수), 하상일(동의대 교수), 박몽구(한양대 강사), 이승하(중앙대 교수), 장석원(고려대 연구교수), 이경수(고려대 연구교수), 유성호(한국교원대 교수)가 작품론을 썼다.

시인 박몽구는 '폐허의 도시, 불화와 내면의 재건축'이라는 글에서 "박인환이 발견한 도시는 문명의 진보와 사람살이를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공간만이 아닌, 인간을 왜소화하고 소외시키는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며, 박인환의 모더니즘은 서구적 영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에 뿌리박은 토착 모더니즘이라고 평했다.

시인 공광규는 "박인환은 해방 직후 정치권과 문단의 좌우 분열로 혼란스러웠으나, 거기에 휘말리지 않고 그가 생각하는 '시민정신'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고 말한다. 이어 1976년 그의 20주기에 아들이 펴낸 <목마와 숙녀>에도 현실참여 의식이 강한 '남풍' '자본가에게'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 등이 당시 정치적 상황 때문에 빠져 있다고 덧붙였다.

"40계단 아래 그 목욕탕이 있던 골목의 나지막한 다방에서 내가 뭔가 쓰고 있노라면, 영화배우 같이

 말끔한 박인환이 들어선다...

"거꾸로 쓰니까 시가 되더군! 규동, 자네도 한번 해봐. 마지막 행부터 쓰거든. 재미있어!"

"자식 싱겁기는! 차나 마셔." 하고 보는 체도 하지 않고 원고지를 메꾸어 가노라면 "나, 가." 하고 탁자

 위에 놓인 담뱃갑을 훌렁 집어넣고 어슬렁 사라진다." -김규동, '한 줄기 눈물도 없이' 몇 토막

 

 

 

 

 

 

 

 

 

 

 

 

 

 

 

 

 

 

 

 

 

 

 

 

 

 

 

 

 

 

 

 

 

 

 

 

 

 

 

 

 

 

 

 

 

 

 

 

 

 

 

 

 

 

 

 

 

 

 

 

 

 

 

 

 

 

 

 

 

 

 

 

 

 

 

 

 

 

 

 

 

 

 

 

 

 

 

 

 

 

 

 

 

 

 

 

 

 

 

 

 

 

 

 

 

 

 

 

 

 

 

 

 

 

 

 

 

 

 

 

 

 

 

 

 

 

 

 

 

 

 

 

 

 

 

 

 

 

 

 

 

 

 

 

 

 

 

 

 

 

 

 

 

 

 

 

 

 

 

 

 

 

 

 

 

 

 

 

 

 

 

 

 

 

 

 

 

 

 

 

 

 

 

 

 

 

 

 

 

 

 

 

 

 

 

 

 

 

 

 

 

 

 

 

 

 

 

 

 

 

 

 

 

 

 

 

 

 

 

 

 

 

 

 

 

 

 

 

 

 

 

 

 

 

 

 

 

 

 

 

 

 

 

 

 

 

 

 

 

 

 

 

 

 

 

 

 

 

 

 

 

 

 

 

 

 

 

 

 

 

 

 

 

 

 

 

 

 

 

 

 

 

 

 

 

 

 

 

 

 

 

 

 

 

 

 

 

 

 

인제 합강정에서 여행길에 잘 쉬여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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