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전회' 만남

경북 문경 "운강 이강년 기념관"

마이동 2021. 5. 20. 21:18

 

 

2021년 4월 9일 금요일 셋째날, 오전 학천정을 출발하여 922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다 

문경 "운강 이강년 기념관" 에 도착, 기념관 관계자의 안내로 자세한 해설과 설명을 듣을

 

수 있어서....  이 블로그를 통해 감사함을 전합니다.

 

 

 

 

 

 

 

 

 

 

 

 

 

 

 

 

 

 

 

 

 

 

 

 

 

 

 

 

 

 

 

 

 

 

 

 

 

 

 

 

 

 

 

 

 

운강 이강년 기념관

 

경북 문경시 가은읍 대야로 1683

(지번) 가은읍 완장리 96

054-550-6415

 

 

 

 

 

 

 

 

 

 

 

 

 

 

 

 

 

 

 

 

 

 

 

 

 

 

 

 

 

 

 

 

 

 

 

 

 

 

 

 

 

 

 

 

 

 

 

 

 

 

 

 

 

 

 

 

 

 

 

 

 

 

 

 

 

 

 

 

 

 

 

이강년은 1858년(철종 9) 12월 30일 경상도 문경현 가은면 도태리(현재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 도태마을)에서 부친 이기태(李起台)[4]와 모친 의령 남씨 남복영(南福永)의 딸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효령대군의 18대손이지만 9대조 이성민(李聖民)이 안동으로 낙향한 뒤에는 5대조 이윤욱(李允郁)이 1749년(영조 25) 춘당대시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을 지냈으며... < 생략 >

이강년은 안동에서 학문을 닦고 도의를 숭상하는 전통적인 가풍을 유지해온 것으로 보인다.

 

전주 이씨 족보에 따르면, 모친이 이강년을 낳을 때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으며, 이때문에 아명이 출양(出陽)이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장성하면서 8척 2촌의 장신이었고 용력이 출중하고 병서에 조예가 깊어 일찍부터 장군의 재목으로 지목되었다고 한다. 그가 성장하면서 어떤 학문을 닦았으며 스승이 누구였는지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효행으로 이름난 조부 이덕의(李悳儀)[5] 아래에서 그의 부친이 일찍부터 학자로 명성을 이름을 날렸던 점, 백부 이기택(李起宅)[6]이 삭주부사를 지낸 점 등을 미뤄볼 때 유년기부터 집안에서 학문을 닦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22살이 되던 1879년(고종 16) 2회 정시 무과에 병과 51위로 급제한# 그는 관직에 나아가 선전관이 되었지만 갑신정변 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학문에 더욱 매진했으며, 때로는 영남과 호남 등지를 두루 여행했다고 한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발발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문경에서 거병했다. 이후 안동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을 처단한 뒤 안동으로 들어가 의병장 권세연을 만나 군사작전을 논의했다. 이때 유인석과 만난 그는 유인석의 문인이 되었고, 유인석에게 글을 올려 "난적을 토벌하고 원수 오랑캐를 멸해 나라의 옛 법도를 회복하고자" 의병을 재기했다고 밝히면서, 그의 가르침을 받아 하늘과 땅 사이에 옳을 '義' 한 자가 있음을 알아 굳게 가슴에 간직하고 한 몸 있음을 알지 못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강년은 유인석 휘하에서 제천의진의 유격장에 임명되었고, 문경, 수안보 등지에서 관군과 맞서 싸웠다. 그는 일본군 병참기지를 공격하는 한편, 영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상렬 부대를 엄호하였으나 수안보를 공격하면서 호응하기로 한 전군의 작전이 원활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1896년 5월 하순 제천성이 장기렴(張基濂)이 이끄는 관군에게 공략된 뒤, 유인석이 양서지방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망명할 때 그 뒤를 따르려 했지만 영월에서 진로가 막혀 부득이 소택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1896년 8월 소백산에서 의병을 해산시킨 뒤 단양 금채동(현재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상원곡리 김치골)로 들어가 부모를 봉양하며 은거했다.

 


1897년, 이강년은 유인석을 만나기 위해 단신으로 서간도에 건너 수개월 동안 요동을 유랑한 뒤 귀국했다. 그가 서간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귀국 후 학문수양에 진력했으며, 화서 문파의 공동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는 호남, 여남 각지를 유람하며 이름난 선비들과 교유하며 성리와 예악 등에 대한 토론을 통해 자기수양에 진력했다. 한편 1899년 충주에서 화서문집이 간행되었을 때 그도 여기에 참가했으며, 문집이 완간되자 평북 봉천까지 올라가 그 일대의 동문들에게 문집을 배부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이강년은 의병을 일으키려 했지만 뜻밖에 병을 얻어서 즉시 거병하지 못했다. 이후 1907년 5월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이후로 1년 3개월 동안 단양, 제천, 원주, 영월, 횡성, 강릉, 청풍, 충주, 문경, 에천, 영주, 봉화, 안동 등 경북과 강원, 그리고 충북 일대를 돌며 일제 군경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동안 전력이 극도로 소모되어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할 필요성이 생기자, 그는 북상하여 가평군 일대에서 겨울을 난 뒤 영월을 거쳐 청풍으로 남하해 까치성에 유진했다. 그러던 1908년 7월 2일, 일본군이 기습을 가해왔다. 그는 이들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였지만 끝내 대패하고 자신도 총상을 입은 채 포로가 되었다.

이강년은 체포 직후 일본군이 자신의 상처를 치료하려 하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그들이 제공하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무정하다 탄환이여
발목을 상하여 나아갈 수 없구나
차라리 심장에나 맞았으면
욕보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

 

 

 

 

 

 

 

 

 

 

 

 

 

 

 

 

 

 

 

 

 

 

 

 

 

 

 

 

 

 

 

 

 

 

 

 

 

 

 

 

 

 

 

 

 

 

 

 

 

 

 

 

 

 

 

 

 

 

 

 

 

 

 

 

 

 

 

 

 

 

 

 

 

 

 

 

 

 

 

 

 

 

 

 

 

 

 

 

 

 

 

 

 

 

 

 

 

 

 

 

 

 

 

 

 

 

 

 

 

 

 

 

 

 

 

 

 

 

 

 

 

 

 

 

 

 

 

 

 

 

 

 

 

 

 

 

 

 

 

 

 

 

 

 

 

 

 

 

 

 

 

 

 

 

 

 

 

 

 

 

 

 

 

 

 

 

 

 

 

 

 

 

 

 

 

 

 

 

 

 

 

 

 

 

 

 

 

 

 

 

 

 

 

 

 

 

 

 

 

 

 

 

 

 

 

 

 

 

 

 

 

 

 

 

 

 

 

 

 

 

 

 

 

 

 

 

 

'단전회' 님들과 경북 문경 "운강이강년기념관' 을 탐방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