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선생 고택
비올듯한 더위를 달래며 "도사모" 님들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 김정희선생 고택을 찾았습니다.
석년(石年)
사랑채댓돌 앞에 세워진 이 돌기둥은 해시계 받침 용도로 쓰였으며,
석년(石年) 이라는 글씨는 추사선생의 아들인 상우(商佑)가 추사체로 쓴 것을 각자(刻字)한 것이다.
죽노지실 ( 竹爐之室 )
『 차를 끓이는 죽로 ( 겉을 뜨겁지 않게 대나무로 감싸서 만든 화로 ) 가 있는 방 』
이란 뜻으로 추사가 친구인 황상( 黃裳 ) 에게 써준 다실(茶室) 이름이다.
예서(隸書).
전서의 형을 살리어 그림을 피하는 듯하여 지나치게 교(巧)를 부린 작품이다.
추사의 글씨를 평하여 일반적으로 졸(拙)한 것이 그의 특징이라고 모는 사람도 있으나,
실은 추사의 글씨는 교(巧)하지 않은 것이 거의없다.
다만, 그의 교(巧)는 이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정교(精巧)에 속하는 것이 아니요,
불균형적(不均衡的)인 표현으로 나타내는 교(巧)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런 점으로 보아 이 작품은 예외가 될 것이다. (호암미술관 소장)
무량수 (無量壽)
「 한 없는 수명 」 이란 뜻으로, 불교의 윤회설에 입각하여 쓴 글이다.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삼세(三世) 고금을 통하여 한이 없기 때문에 무량수라 하였다.
왼쪽의 승련노인(勝蓮老人)은 추사선생의 호(號)이다.
만수무강 (萬壽無疆)
건강과 장수를 빌 때 쓰는 말로써, 「 한없이 목숨이 긺 」을 나타내는 뜻이다.
예서(隸書)
오른쪽의 소연정지(小연正之)는 추사선생의 호(號)이다.
이글씨는 누구에게, 언제 쓴 작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제주도 유배생활과 관직을 떠나 71세 때 경기도 과천 봉은사(奉恩寺)에
기거하고 계실 때, 「 大烹豆腐瓜薑菜(대팽두부과강채), 高會夫妻兒女孫(고회부처아녀손) 」
이란 글씨를 행농(杏農) 유기환(兪麒煥)에게 선물할즈음 다른 친구에게 써 준 글씨로 추정된다.
불이선란(不二禪蘭)
추사 선생은 특히 난초를 잘 쳤는데, 난초 치는 법 역시 예서(隸書)쓰는 법과
비슷해서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券氣)가 있어야만 잘 할 수 있으며,
화법을 따라 배워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 난초 그림은 초서(草書)와 에서(隸書)의 기자(奇字)의 법으로 그린 것으로,
파격을 넘어 불이선의 경지에 다다른 불계공졸(不計工拙)의 명화이다.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완당 나이 59세때, 제주도에서 귀양살이 하는 동안에
제자인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완당 생애 최고의 명작이다 .(개인소장)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묘
1937년에 초배(初配)인 한산이씨 묘에 추사묘와
계배(繼配)인 예안이씨 묘를 이장하여 3위를 합장하였다.
망부석 1쌍이 있고, 묘비는 그 해 9월에 세웠는데,
종인(宗人) 김승렬( 金承烈)이 짓고 섰다.
추사기념관
추사 기념관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드높은 서예정신과
위대한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고 후세에 남긴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여 추사 선생의 다양한 면모와 그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해
2008년에 건립되었다
시경(詩境)
예산 화암사 대웅전 뒤에 병풍바위가 있는데, 추사는 이 바위에 웅방강으로부터 선물받은
육방웅의 「 시경(詩境) 」 이라는 예서 글씨(탁본)와, 이 절집을 「 천축나라(인도)의
옛 선생댁 」이라는 말로 풀어서 「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이라고 새겨놓았다.
"도사모" 님들과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
그리고 추사 기념관을 더위도 잊은체 관람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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