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 화 문 [光化門]
광화문(光化門)은 서울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景福宮)의 정문(正門)으로서 조선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상징하는 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복궁의 외곽성은 외적에 대한 방어 목적보다는 궁궐에 위엄을 더하고 궁전을 호위할 목적으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낮게 쌓고 그 둘레의 동서남북에 각각 성문을 만들었는데, 그 중 광화문은 남문에 해당하는 것이다. 1935년(태조 4년) 9월 창건된 광화문은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으로 명명되었으나 1425년(세종 7) 집현전에서 광화문이라고 바꾸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270여 년 간 중건되지 못하다가 1864년(고종 1) 흥선대대원군의 경복궁 재건으로 다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 원래의 광화문은 석축기단(石築基壇)에 3궐(三闕)의 홍예(虹朗)를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의 중층우진각 지붕으로 된 목조문루를 세운 것이다. 두공은 다포식(多包式)으로 상하층이 모두 외이출목(外二出目) ·내삼출목(內三出目), 외부는 제공(諸工) 뿌리를 쇠서로 하고, 내부는 운공(雲工)을 만들었으며, 첨차(墅遮) 양측면에는 모두 파련초각(波蓮草刻)을 하였다. 이 건물은 섬세한 수법과 웅대한 구조를 보여주고,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장려한 외관을 지닌 가장 뛰어난 궐문(闕門)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1927년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의 하나로 조선 총독부 청사가 경복궁 자리에 들어서면서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옮겨졌는데, 이 과정에서 궁궐의 동편 담장 역시 수난을 당하여 헌병대로 가는 길을 내느라 안쪽으로 5m 밀려들어갔다. 한국전쟁 중 1951년 1·4후퇴를 전후한 시기에 폭격으로 인한 화재로 문루 부분이 소실되어 석축만 남게 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제3공화국 당시 1968년에 석축을 모아 원래 위치로 옮기고 문루 (門樓) 부분은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것으로 그럴 듯하게 전통건축의 모습을 흉내내기는 하였지만, 경복궁의 정문임에도 불구하고 국보나 보물은커녕 지방문화재나 사적에도 끼지 못하는 값싼 철근콘크리트 구조물로서 이는 전통문화복원과는 다소 거리가 먼 제3공화국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 측면이 강하다. 현재의 현판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으로 한글로 적혀 있다. 원래 광화문은 관악산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지금 현재는 남산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광화문의 복원과정에서 조선총독부를 기준으로 그 정문자리에 복원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제는 의도적으로 조선총독부 청사를 경복궁과 3.5° 기울어지게 축조하였는데 광화문의 복원과정에서 이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해체된 지금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는데 근정문에 서서 흥례문과 영제교를 바라보면 광화문이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 경복궁 복원사업이 진행중에 있는데 광화문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작업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즉, 율곡로에 자기자리를 내어준 채 원래 위치보다 13m나 뒤에 그것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는 광화문을 제자리로 환원시켜야만 경복궁 복원사업도 그 빛을 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초여름 무더위 속에 광화문쪽에 일을 보고 돌아오며
옛날 자주갔던 광화문 거리를 몇년만에 걸어보며 조금 담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