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안동 유교문화박물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지번) 도산면 서부리 220
054-851-0800
2019년11월 26일 화요일 아침, 멋진 안동호반자연휴양림에서
가까운 안동 '유교문화박물관' 을 4인방 친구들과 천천히 유익하게 관람하고 갑니다.
국내 유일의 '유교' 전문박물관
한국국학진흥원의 부속기관인 유교문화박물관은 우리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국내외에 알리고, 이를 토대로 국학자료의 기탁을 활성화하려는 목적에서 설립된 국내 유일의 '유교' 전문박물관입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개별 문중이나 서원 등 민간으로부터 기탁받아 소장하고 있는 국학자료들 가운데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것들을 엄선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박물관 본관에는 특별전시실을 포함한 모두 9개의 전시실과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홍익의 집 1층에
현판전시실이 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전시공간은 유교의 실천덕목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순으로 동선이 이루어지며, 기획전시실에서는 매년 2회 이상 기획전시가 개최됩니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은 우리 전통문화의 중심인 유교문화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과 풍부한
볼거리를 꾸준히 발굴하여 전시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산실로서의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유교문화에 대한 개괄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공간이다.
유교문화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동아시아 유교 연표와 한중일의 유교이야기 그리고
한국 유학의 흐름과 그 학맥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유교경전
유교의 경전은 전통적으로 '육경六經'에서 출발한다.
'육경'은 통상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악경樂經', '역경易經', '춘추春秋'를 말한다.
이 가운데 악경은 일찍이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중국 한나라의 무제武帝는 '박사博士' 라는 관직을 두어 나머지 다섯 경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제도를 마련했는데, 이 때부터 이들을 묶어 '오경五經'이라고 불렀다.
'삼경三經'이라는 용어는 이 가운데 '시경', '서경', '역경'만을 특별히 가리킬 때 쓰는 이름이다.
한편 '사서四書' 라는 명칭은 성리학을 집대성시킨 집대성시킨 중국 남송南宋의 유학자 주희朱熹가 오경의 하나인
'예기'속에 들어 있던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실질적으로 독립시키고 '논어論語', '맹자孟子'와 함께 뜻을 풀이한
주석글을 붙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로부터 유교의 경전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서삼경' 혹은 '사서오경'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었다.
시경詩經
중국고대의 시가집이다. 주로 온나라와 주나라 시대의 시들이 수록되어 있다.
지은이는 정치를 담당한 위정자들에서부터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내용 역시 선정에 대한 칭송에서부터 학정에 대한 풍자,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 등으로 다양하다.
서경書經
중국 최초로 산문으로 기록된 책이다. '상서尙書'라고도 불린다.
은나라와 주나라의 사관史官들이 임금의 언행과 정치를 기록한 글을 모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유교에서는 대대로 정치 교과서로 받아들여졌다.
역경易經
동양적인 우주론의 바이블로 통하는 책이다. '주역周易'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우주의 이치를 응용해 점을 치던 기록인 '경經'과 그 '경'의 의미를 후대에 철학적으로 해석한 '전傳', 두 부분으로
나뉜다.
예기禮記
'예에 대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중국 전국시대 말기부터 한나라 초기에 걸쳐 형성된 유학자들의 예에 관한 글들을
집대성한 책이다.
예의 제도의 실제적인 내용들을 주로 기술한 '의례儀禮'와 주나라의 문물제도를 이상적인 관점에서 정리한 '주례周禮'
와 함께 '삼례三禮'로 불린다.
춘추春秋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 은공隱公 원년(기원전 722년)부터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년)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중국
최초의 編年體(사건을 시간순으로 기록하는 역사 서술의 한 방식) 역사서이다.
'대의명분'으로 상징되는 유교의 역사철학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전승 과정에 따라 '좌씨전左氏傳'과 '공양전公羊傳' 그리고 '곡량전穀梁傳' 세 판본으로 나뉜다.
논어論語
공자가 죽은 후 주로 그의 2세 제자들에 의해 편찬된 어록집이다.
공자의 언행과 공자와 제자들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주된 내용이다.
공자의 인생관과 정치관, 교육관 등을 직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교의 가장 핵심적인 경전이다.
맹자孟子
중국 전국시대의 유학자 맹자의 생각을 모아 놓은 책이다.
맹자 자신의 저작이라는 설과 그의 제자들이 편집했다는 설이 공존한다.
공자의 사상을 심성론적으로 한 걸음 발전시킨 성선론과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정치사상이 유명하다.
대학大學
본래 '예기'의 한 편이었으나, 중국 북송北宋 시대의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頤 형제가 이 부분을 특히 중시하여
독립된 책으로 분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남송의 주희가 이를 다시 경經과 전傳으로 나누어 주석을 달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로 상징되는 유교적 실천론의 핵심을 담고 있는 책이다.
중용中庸
역시 '예기'의 한 편이다. 대학과 마찬가지로 북송의 정이가 중시하였고, 주희가 그 뜻을 받을어 '대학'과 함께
분리하여 사서四書의 하나로 정리하였다.
유교 특유의 도덕적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책이다.
유교의 경전으로 가리키는 용어로는 이 밖에도 중국 당나라 때 성립된 '십삼경'이라는 명칭도 종종 쓰인다.
이는 오경에 '의례'와 '주례', 공양전', '곡량전'을 보태고, 여기에 다시 효孝의 근거와 효행의 중요성에 대해 논술한
책인 '효경孝經'과 중국 고대의 문자 해설서인 '이아爾雅'를 합친 것이다.
공자는 어떤 사람일까?
공자孔子의 이름이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이다.
기원전 551년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에서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공자는 성장한 후 조국인 노나라에서 아주 짧은 기간 공직에 종사하였을 뿐, 대부분의 생애를 중국 각지를 떠돌며
제후들에게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일에 바쳤다.
이런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자 말년에 조국으로 되돌아와 서책을 정리하고 제자를 기르는 일에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다 기원전 479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공자는 가족주의를 바탕으로 사람들 사이에 신뢰와 사랑이 충만한 대동大同 사회를 꿈꾸었다.
공자의이런 소망은 '인仁'과 '예禮'로 구체화되었는데, 이같은 가르침은 중국 한漢나라 이후 동아시아 문화권을
관통하는 정신적인 좌표로 구실하였다.
< 안녕하세요 공자할아버지 >
동아시아 유교이야기
유교는 개인의 인격 완성을 통하여 대동大同의 이상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다.
공자에서 비롯된 이 같은 꿈을 유교에서는 보통 '수기修己 (개인적 수양을 통한 도덕 인격의 완성)와 '안인安人'
(사회적 실천을 통한 대동 사회의 구현)이라는 말로 간추려 표현한다.
한국 · 중국 · 일본 세 나라의 유교는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이상과 목표를 함께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각국의
고유한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토양에 따라 자기 나름의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한국의 유교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였을까?
우리나라의 유교는 삼국시대를 전후하여 중국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한자와 함께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로 들어오면 유교가 정치적 운영원리로 중시되면서 제도적인 측면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과거를 통해 관료를 충원하게 되면서 유학은 관료가 되기 위해 필요한 지식이 되었고, 이후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고려말 중국으로부터 주자학을 근간으로 하는 성리학이 도입되었고, 이후 조선의 건국과 함께 국가 이념으로
표방되었다. 이후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유교는 정치이념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회 각 방면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유교는 중기로 넘어오면서 이론 연구의 수준도 심화되어
부분적으로 중국을 능가하는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
사칠논쟁 등을 통하여 이론적인 성숙을 경험한 조선 유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양란을 거치면서 성리학적
가치의 실천성을 문제삼는 예학의 전성시대로 접어든다.
병자호란 후 중국을 통해 서양문물이 들어오자 조선 유교는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학과 운명적으로 조우함으로써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였다.
아울러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주자학의 현실 경영 능력이 약화되고 서학을 통해 새로운 문물에 눈을 뜨게 되자
이에 대한 대응으로 조선후기 실학이 태동하였다.
19세기 들어서는 서세동점의 파고가 더욱 거세지면서 국권상실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조선 유교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의병운동을 통하여 시대적인 소임을 수행하였다.
한국유학의 학맥
한국의 유학은 안향安珦이 성리학을 도입하면서부터 이제현, 이색, 정도전, 정몽주, 길재, 권근 등에 의해
조선시대로 전해졌다.
성리학性理學을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시대는 성리학의 연구수준이 심화되었다.
한국 성리학의 이해수준이 높아지면서 유학자들 사이에 성리학에 대한 이해 내지 견해 차이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황과 이이로 대표되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내부에도 다양한 분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의 운영과 개혁 방식 등에도 차이를 보였다.
조선 유학의 학파는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를 중심으로, 남명학파, 화담학파, 우계학파 등이 조선후기까지 지속적으로
계승되며, 학문을 심화시켜 갔다. 19세기에 오면 북학파, 실학파, 개화파 등 새로운 유교 변혁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수양은 무엇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먼지가 나지 않도록 물을 뿌려 마당을 쓸고 집 안팎의 사람들을 공손히 접한다는 쇄소응대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주변의 사소한 일들부터 가르치는 것이 바로 소학이다.
즉 훌륭한 유학자인 선비가 되기 위해 어린이가 배워야 할 유교 윤리에 관한 가르침을 '소학'이라고 부른다.
'소학'은 글자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작은 규범들을 배우는 학문'이라는 뜻으로, 선비가 되기 위해 익혀야 할
'대학' 공부의 준비 단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도덕적 실천을 강조했던 조선시대의 사림들이 소학 공부를 중시하였다.
특히 조광조의 스승이었던 한훤당 김굉필 (1454-1508)은 『소학』을 늘 가까이 하여 '소학동자'로 불렸다.
인간의 마음은 모두 선하기 때문에 인간을 신뢰해야 한다.
유교는 '사람은 누구나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같은 유교적 인간관을 대표하는 학설이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이다.
맹자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은 네 가지 착한 마음을 씨앗의 형태로 간직한 채 태어난다.
바로 '다른 사람의 어려운 처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惻隱之心)과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미워하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수오지심羞惡之心), '양보할 줄 아는 마음'(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해낼 줄 아는
마음'(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유학자들이 한 평생 공부하는 목적은 궁극적으로 이 네 가지 착한 마음의 씨앗을 싹틔우고 잘 키워서 온 마음이
그 향기로 가득 차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할 때 이 네 가지 착한 마음의 씨앗은 각각 인仁·의義·예禮·지智라는 도덕으로 열매 맺는다.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할까?
이것을 유교에서 공부라고 말한다.
지식을 습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공부인 것이다.
공부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유교에서는 맹자가 말한 네 가지 착한 마음의 씨앗을 도덕적 인격을 갖추는 데 필수적인 실마리로 여겨 이를
'사단四端'(네 가지 단서)이라고 부른다.
유교의 '수양修養'이란 곧 자신의 마음속에 간직된 이 사단을 확인하고 그것을 잘 길러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도덕적 인격을 이루기 위해 기울이는 실천적인 노력들을 유교에서는 '공부工夫'라고 한다.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이황李滉은 온 마음을 하나로 모아 흐트러지지 않도록 하는 '경敬' 공부를 중시하였고,
이이李珥는 대자연의 쉼 없는 성실성과 완전히 일치하여 아무런 거짓도 없이 진실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해나가는
'성誠' 공부를 강조하였다.
나를 다스리는 공부는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유교는 사회를 가정이 확장된 것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유교의 실천 윤리에서는 가정과 사회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같은 생각이 밑바탕이 되어 확립된 규범이 바로 '오륜五倫'이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부자유친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원칙을
지켜나가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군신유의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역할의 분별이 있어야 하고(부부유별
夫婦有別), 나이 많은 사람과 나이 어린 사람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하며(장유유서長幼有序),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붕우유신朋友有信)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륜이 본격적으로 장려된 때는 유학을 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시대이다.
세종世宗 14년(1431)에는 군신·부자·부부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를 담아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반포하였고,
중종中宗 13년(1518)에는 장유·붕우 사이에 지켜야 할 윤리를 실어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를 펴냈으며,
정조正祖 21년(1797)에는 이 둘을 통합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를 간행하여 유교 윤리를 널리 보급하였다.
군위유의
부부유별
부자유친
붕우유신
장유유서
분노와 슬픔, 기쁨, 사랑 등의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야 할까??
솔직하게 다 드러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숨기는 것이 좋을까?
유교는 그 감정을 상황과 함께 말하고 있다.
그 상황에 따라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게 감정을 다스를 줄 알아야 한다.
중中과 화和
'과불급過不及', 이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유교의 수양은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황에 알맞게 드러내는 일을 중시한다.
유교에서는 마음속의 감정이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고 부른다.
감정이 아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속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되,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마주한 상황에 딱 어울리도록 표현된
상태를 '화和'라고 부른다.
유교에서 도덕적 인격의 수양과 관련하여 중시하는 '중·화'는 이처럼 마주하는 상황에 적절하게 정서적으로
반응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런 까닭에 유교에서는 '시중時中', 즉 '상황에 항상 맞아 들어가는 중中'을 최고의 경지로 여겼다.
화이부동和而不同
감정을 다스리는 것을 무엇을 위한 것인가?
'중?화'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남과 맹목적으로 어울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인 원칙을 지키며
화합해간다.
이 점을 가리켜 공자는 "군자는 자신의 도덕적 원칙을 지키면서 주변과 조화되기를 추구하지만,
소인은 자신의 원칙을 내팽개치고 남과 같아지는 데만 급급해 한다"고 말하였다.
요컨대,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어가는 사람이 참다운 유학자,
즉 '선비'인 것이다.
이는 마치 온갖 악기들이 각각의 고유한 소리를 드러내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음악을
연주해내는 이치와 같다.
중용 이야기
유교는 어떠한 소양을 갖추게 하였을까?
육예六藝는 '예禮'(생활 의례)·'악樂'(음악)·'사射'(활쏘기)·'어御'(수레 몰기)·'서書'(글쓰기)·'수數'(셈하기)
여섯 가지 기예를 가리킨다.
이 여섯 가지는 선비들이 몸과 마음을 기르기 위해 꾸준히 익히고 활용하던 실용적인 기예들이다.
공자가 제자들을 가르칠 때 활용했던 구체적인 교육 내용이 이것이었다고 전해질 만큼 육예의 역사는 깊다.
이런 점에서 육예는 선비들의 가장 오래된 종합 교양이며 유학 공부를 위한 기본적인 소양이다.
선비의 길
선비는 곧 '군자君子'이다.
유교에서 가장 모범으로 떠받드는 인격체이다.
예로부터 군자다운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두고 많은 주장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역시 맹자가 말한
'대장부론 大丈夫論' 이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집에서 살고,
세상에서 가장 바른 자리에 서며,
세상에서 가장 떳떳한 길을 간다.
사람들이 알아주면 그 사람들과 함께 그것을 실천해가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홀로 그 원칙을 지켜 나간다.
재물과 벼슬의 유혹으로도 그 마음을 흩뜨릴 수 없고,
가난과 비천의 고난조차도 그 의지를 무너뜨릴 수 없으며,
권위와 무력의 위협으로도 그 기개를 꺾을 수 없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대장부'라고 한다.
마음과 우주의 대화 주역의 세계
주역이란
'주역周易'은 우주 자연과 인간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와 질서에 대해 기술한 책이다.
'주역'은 원래 중국 고대에 점을 친 기록들을 모아 엮은 점술 서적이었다.
그러다가 여기에 수록된 점괘占卦와 그 풀이말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10편의 글이 후대에 덧보태어지면서
유교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주역점을 치는 방법
주역점은 50개 산가지로 모두 18번의 조작을 거쳐 점괘를 얻는 방식이다.
주역은 여섯 개의 효爻가 모여 하나의 괘卦를 이루는 구조이다.
괘는 모두 64개이니, 효는 총 384개이다. 점을 치면 이 괘와 효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의 점괘가 된다.
점괘가 나오면 점괘에 해당하는 효나 괘의 모양과 그에 딸린 풀이말(효사爻辭와 괘사卦辭)의 의미를 곰곰이 성찰하여 점괘를 해석한다.
주역점을 받아들이는 자세
주역의 점괘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과 판단은 점친 사람 자신이 내려야 한다.
주역은 다만 점치는 사람이 묻는 문제에 상응하는 우주 자연의 마음을 점괘를 통해 열어 보일 따름이다.
이런 까닭에 역대로 유학자들은 주역을 두고 '마음을 씻어내는 경전', 즉 '세심경洗心經'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점을 치는 사람은 점괘를 빌어 펼쳐 보이는 우주 자연의 마음을 화두로 삼아 자신이 던진 물음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끊임없이 찾아나서야 한다.
선비는 자신의 건강을 어떻게 돌볼까?
유교의 수양에서는 마음 공부뿐만 아니라 몸 공부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음 공부의 결실이 결국 몸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유교에서는 몸과 마음을 떼어 놓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몸을 다스리는 일도 마음을 다스리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수양 공부라고 생각하였다.
유교와 가족
과거의 가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가족은 현재의 핵가족과는 달리 대가족제도였다.
조부모, 부모, 나, 자식 등 4대나 5대의 가족이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았고, 또한 친인척이 한 마을에 모여 사는
동성同姓마을도 있었다.
3년마다 관할 관청에 가구의 호구상황을 신고하던 호구단자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 많으면 그에 따라 재산의 분배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수 있다.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재산은 아들과 딸 모두에게 균등하게 배분되던 것이 조선 중기 이후 점차 제사를 받드는
장손에게 상속의 비중이 높아지게 된다.
가족도 종손과 맏아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그 동생들은 분화하여 또다른 가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이 일종의 종법宗法제도이다.
가족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에는 유학의 삼강오륜三綱五倫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효孝와 자慈,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를 의미하는 제悌는 중요한 덕목이다.
유교 덕목들을 통해 그 질서가 유지되면서 외형적으로는 점차 아들을 중심으로 변화되어 갔다.
장손을 중심으로 가족 질서가 승계되는 종법제도의 가족형태에서 아들은 점차 가족의 유지를 위해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아들이 없을 경우 친인척의 혈족으로부터 양자를 들일 만큼 아들은 자식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가 되었다.
유학자는 평생 어떤 삶의 궤적을 가질까?
글공부를 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살이를 하며 자신의 뜻을 펼치고, 은퇴하여 학문에 전념하거나 후학을
기르는 것이 그들의 모습이다.
선비가 추구하는 삶의 최고 목표는 무엇일까?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유학자들은 어릴 때부터 철저한 인격 수련과 학문 연마의 과정을 거쳤다.
성인이 되면 과거를 통해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이 배운 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고자 노력하였고, 또 벼슬에서
물러나면 향촌으로 내려가 후학들을 양성하며 학문을 정리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유학자들은 이 모든 과정을 선비라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사회적인 책무로 여겼다.
결코 한시라도 자신에 대한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태교와 아동 교육
임신 중인 어머니가 몸과 마음가짐을 조심함으로써 태아에게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좋은 영향을 주기 위해
행하는 모든 일을 '태중 교육', 즉 '태교胎敎'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교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태교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이에 따라 오래 전부터 태교에 관한 문헌들이 많이 전해져 왔는데, 그 가운데 18세기 무렵 사주당師朱堂 이씨李氏가
지은 『태교신기胎敎新記』가 손꼽힌다.
훌륭한 태교를 통하여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장차 덕망 있는 선비로 키우기 위한 교육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동 교육은 주로 가정과 서당에서 행해졌으며, 주된 교육 내용은 기초적인 학문과 일상의 예절에 관한 것이었다.
아동 교육을 위한 주요 교재로 활용되던 『소학』역시 청소하고 인사하는 법, 손님 접대하는 법과 같은 일상의 예절
및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며 친구 사이에 신의를 지키는 일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관례와 계례
전통 의례에서 어른이 될 때 치르는 의식을 말한다.
남자는 관을 쓰고 여자는 비녀를 꽂았기 때문에 각각 관례冠禮와 계례筓禮라고 한다.
대략 15살에서 20살 무렵에 예식을 치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초기부터 왕실에서 유교식 관례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보이나 실질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말에 가례家禮가 도입되면서부터이다.
성리학이 보편화되었던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가례에 규정된 절차를 좀더 간소화하여 치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계례는 관례만큼 보편적으로 시행되지는 않았던 듯하나, 그 흔적은 오늘날의 혼례식에 일부 남아있다.
관계례 예식의 절차는 통상 초가례初加禮(시가례始加禮), 재가례再加禮, 삼가례三加禮 순으로 진행되었다.
시집, 장가가기
유교식 혼례婚禮의 발생지인 중국에서는 육례六禮의 절차에 따라 혼례가 행해진다.
육례의 절차는 신랑 측에서 혼사를 제안하고 신부 측에서 받아들이는 납채納采, 신랑 측에서 신부의 이름을 물어
길흉을 점쳐보는 문명問名, 점친 결과가 길조라는 사실을 신부 측에 알리는 납길納吉, 폐백을 신부 측에 전달하는
납폐納幣, 혼인을 약속하고 날짜를 정하는 청기請期, 혼례식을 치르기 위해 신랑이 신부를 맞아들이는 친영親迎
순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달리 주희朱熹가 육례를 축약하여 만든 사례四禮에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례란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을 말한다.
의혼議婚
신랑 측과 신부 측이 혼사를 의논하는 절차이다.
양측은 서로 사람을 보내어 상대방의 인품과 학식, 형제 관계 등을 알아본 뒤, 신랑·신부의 궁합을 보아 합의가
이루어지면 혼인을 결정한다.
납채納采
혼인 약속이 맺어지면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신랑의 사주四柱를 써 보내며 연길涓吉을 청하는 절차이다.
신부 측에서 혼인을 허락하는 편지나 전갈이 오면, 신랑 측에서는 신랑의 사주와 납채문納采文을 써서 붉은
보자기에 싸 보낸다.
신부 측에서는 신랑의 사주를 받으면 신랑과 신부의 운세를 가늠해 보고 혼례 날짜를 택하여 신랑 측에 통지하는 데,
이것을 '연길'이라 한다.
납폐納幣
'납징納徵'이라고도 한다.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신부용 혼수와 그 품목을 적은 물목物目 그리고 혼서婚書 등을 담은 혼수함을 보내는 절차이다.
혼서는 예장지禮狀紙라고도 하는데, 신랑 측에서 신부 측에 딸을 며느리로 보내주는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는 글이다. 신부에게 이 혼서는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일생 동안 간직하였다가 죽을 때 관 속에 넣기도 하였다.
친영親迎
원래 중국에서는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렀는데, 이를 친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인 의례와 절충되어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서 혼례를 치르고 시댁으로 함께 돌아오는
반친영半親迎이 행해졌다.
친영의 절차는 기러기를 초례상醮禮床 위에 놓고 절을 하는 전안례奠雁禮, 신랑과 신부가 서로 절을 하는 교배례
交拜禮, 신랑과 신부가 합근주合巹酒를 마시며 부부가 되었음을 알리는 합근례合巹禮 순으로 진행된다
안방 둘러보기
부모에 대한 효는 유교의 모든 덕목 가운데 으뜸이다.
따라서 어버이의 상례喪禮는 유교의 통과의례 가운데 가장 애통한 것이다.
공자도 일찍이 이 점을 강조하여 상례의 핵심은 외형적인 격식보다도 내면에서 우러나는 슬픔에 있다고 가르쳤다.
우리나라에 유교식 상례가 도입된 것은 성리학이 들어온 고려 말기이다.
이때부터 일부 사대부 가문을 중심으로 주희朱熹의 가례家禮에 따라 유교식 상례를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불교식 장례 문화의 영향 탓으로 사대부 계층에서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유교식 상례가 일반화된 것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였다.
유교의 제례 祭禮에는 자기 생명의 근원에 대한 보은의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공자가 가르친 것처럼, 제례를 올릴 때에는 제사를 드리는 장소에 돌아가신 조상이 실제로 강림한 것처럼
느끼고 행동하며 공경하는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이 같은 유교의 제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공통의 조상을 둔 한 핏줄이라는 혈연적 유대 의식을 심어줌으로써,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유교식 제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상례喪禮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이 전래되어 주희朱熹의 가례家禮가 보급되기 시작한 고려 말부터이다.
그 후 유교식 제례 문화가 차츰 정착되어감에 따라 제례의 의미도 천지일월신이나 산신에게 올리던 기존의 제사에서
자신의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가리키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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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안채는 안방과 안대청, 건넌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지는데 대청을 사이에 두고 안방(큰방)과 건넌방(작은방)으로
나뉘었다.
안방은 가사 운영권을 가진 시어머니가, 작은방에는 장차 가사 운영권을 쥐게 될 며느리가 거처하였다.
안채는 집안에서 제일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는데, 이는 여성들의 외부 출입일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보여준다.
또한 역할 분담이 일반화되며서 남자는 가족을 대표하여 외부와의 접촉을 맡고, 여자는 주거 내부에서 일어나는
가사 생활을 담당함으로써 거주 공간에 따른 기능적인 분리도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주부의 주생활영역인 '안채'는 생활의 중심이라는 의미와 내부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대청
대청은 방과 방 사이, 혹은 방과 마당 사이에 나무 널판지를 깔아 만든 커다란 마루를 말한다.
고온 다습한 날씨에 습기와 열을 발산하는 역할을 하여, 중부와 남부 지방에서 특히 발달하였다.
여름에 취침이나 휴식 장소로 널리 이용되어,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편, 제사를 지내는 장소이기도 했다.
양반 가옥에는 안채와 사랑채의 방과 방 사이에 안대청?사랑대청이 있다.
온돌과 더불어, 기후에 적응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랑채
바깥채는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책을 읽고, 손님을 대접하며, 어린 자녀들을 교육하는 장소이다.
침실이면서 서재이고 응접실 구실을 하였다.
사랑채에는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있는데, 손위 세대, 즉 가장의 거처가 큰사랑이고 손아래 세대는 작은사랑에
거처한다.
대문 가까이에 만들어 외부의 손님을 맞이하고, 집의 앞쪽에 위치하여 안채를 가려주는 역할도 하였다.
안채를 보호하고 노비들을 감시하며 외부와 접촉할 수 있는 위치에 두었는데, 이를 통해 그 당시 남녀의 역할 분담을
엿볼 수 있다.
사당채
사당은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가묘家廟 라고도 한다. 유교 문화가 도입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일은 모두가 지켜야 할 원칙으로 중요시되었고,
제사는 이를 실천하는 의식이었다. 그리하여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건립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사당은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렵도록, 집안의 제일 안쪽에 배치했다. 그리고 담장과 대문을 설치하였다.
행랑채
유교사회는 성별과 장유?신분에 따라 거주 공간을 구별하였는데, 그 중에서 행랑채는 신분이 낮은 하인들이 거주하던 공간이었다.
하인들이 거주거나, 혹은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쓰이기도 하였다.
규모가 큰 집에서는 곳간채를 별도로 만들어 보관하기도 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집에서는 바깥행랑채를 따로 두기도 하였다.
바깥행랑채는 대문 양쪽, 혹은 대문 옆 등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두었는데, 이곳에는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거처하였다.
곳간채
경주 최부잣집의 곳간에 얽힌 이야기 하나! 조선시대의 소문난 부잣집의 경주 최부잣집은 곳간에 가득찬 재산 때문이 아니라, 그 재산을 가치있게 섰던 것으로 유명했다.
서기 1671년 현종 때 큰 흉년이 들자,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마당에는 큰 솥이 걸렸다.
곳간에 있는 쌀들을 모두 풀어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위해 죽을 끓이기 시작한 것이다.
""모두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하라.
"" 굶주린 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서로 부축하며 최부잣집으로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 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를 겪게 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
살리는 최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 해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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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중이나 가문이 누구로부터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어져 현재까지
내려왔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족보族譜가 있다.
족보는 원래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육조六朝시대에 왕실의 계통을 정리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 그 시초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족보는 고려 의종毅宗 때 왕실의 계통을 기록하기 위해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이라고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자기 가문의 계통을 확립하려는 차원에서 사대부 집안을 중심으로
족보가 본격적으로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족보의 출간은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활발해지는데, 이는 향촌에 기반을 둔 사족士族 세력들이 자기 가문과
문중을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에서 서로 앞 다투어 족보를 간행했기 때문이다.
유교와 사회
선비의 하루
유교의 모든 가치는 언제나 나를 포함한 사회속에서 실천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인격의 성취를 위한 선비들의 노력 역시 일상 생활에서 이루어진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단정히 하고, 부모에게 문안 인사를 여쭙는 일을 시작으로 잠자리에 들때까지 모든 일상생활은 모두 선비들의 수양을 위한 시간들이다.
마을 아이들 가르치기
서원기행
서원書院은
관학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成均館 및 향교鄕校와 더불어 조선시대 교육제도의 근간을 이루던 사설 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지방에 거주하는 유학자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시국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공론을 형성하던 장소였다.
이 점에서 서원은 사실상 유교의 이념을 전파하고 재생산해내던 사상의 전진 기지였다.
중국에서 서원은 남송南宋의 주희朱熹가 성리학을 보급할 목적으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중건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종中宗 38년(1543) 풍기 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安珦을 제사지내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서 창건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그 효시를 이룬다.
그 뒤 이황李滉과 같은 유학자들이 서원 건립 운동을 주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서원 문화가 꽃을 피웠다.
서원의 주된 기능은 크게 보아 선현先賢에 대한 제사와 강학講學을 통한 학문 연마이다.
하지만 선현에 대한 제사도 제사 자체가 목적이었다기보다는 해당 인물의 학덕을 모범으로 삼아 이를 기리고
본받으려는 의식적 행위였다는 점에서, 서원의 존립 의의는 역시 교육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의 건축 구조는 서원의 두 기능을 고려하여 사당을 중심으로 하는 제향祭享 구역과 강당 및 재실을 중심으로
하는 강학講學 구역으로 나뉜다.
건물의 배치 형식은 몇몇 변형된 경우도 있었으나, 앞면에 강학 구역을 두고 뒷면에 제향 구역을 두는 형태,
즉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과거를 보다
늦가을 여행중 4인방 친구들과
유교문화박물관을 유익한 탐방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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